영화 《위플래시》는 강렬한 연기와 광기 어린 연출, 그리고 재즈 드럼의 날 선 리듬으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훗날 《라라랜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처음부터 거대한 제작비와 화려한 지원을 등에 업고 출발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원래 85페이지 분량의 장편 각본으로 쓰였지만, 신인 감독의 낯선 재즈 영화에 선뜻 거액을 투자하겠다는 곳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그때 감독이 모든 자원과 완벽한 환경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며, 처음부터 거대한 완성품만을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 작품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계획보다 작은 증분(Increment)을 먼저 만드는 일
투자를 받지 못한 셔젤 감독이 택한 방식은 ‘작게 쪼개어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체 시나리오 중 주인공 앤드류가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 플레처 교수의 혹독한 첫 리허설을 겪는 핵심 장면을 떼어내 18분짜리 단편 영화로 먼저 찍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파일럿 프로젝트이자 소프트웨어 개발로 치면 ‘최소 기능 제품(MVP)’을 세상에 먼저 내놓은 셈입니다.
이 시도는 주효했습니다.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단편 부문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작품의 가능성을 세상에 직접 증명해 보였고, 비로소 제대로 된 투자를 유치해 우리가 아는 장편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프로젝트나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종종 ‘완벽한 판’이 깔리기만을 기다리는 함정에 빠집니다. 몇 달씩 기획서를 다듬고, 인력과 예산이 충분히 주어질 때까지 실행을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내 계획대로만 굴러가지도 않고, 시장이나 상황 같은 통제 밖의 변수가 늘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거대한 그림을 한 번에 완성하려 들기보다, 지금 당장 검증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크기로 실행해 반응을 확인하는 태도가 훨씬 현실적이고 강력합니다.
‘투셰(Touché)’, 찔린 순간을 인정하는 용기
작게 시도하고 현실의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바로 ‘피드백’입니다.
몇 년 전 조승연 작가의 강연에서 들었던 펜싱 용어 하나가 기억에 남습니다. 바로 ‘투셰(Touché)’입니다.
프랑스어로 “찔렸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은, 펜싱 경기 중 상대의 칼끝이 내 몸에 닿았을 때 선수가 스스로 외치는 인정의 표현입니다. 찰나의 순간에 칼끝이 스쳤는지는 심판보다 찔린 선수 자신이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낍니다.
그 순간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고 “내가 찔렸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선수만이 비로소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일하는 현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내가 짠 코드에 허점이 있는지, 설계에 무리가 있었는지, 기획의 논리가 빈약한지는 남이 지적하기 전에 만든 당사자가 가장 먼저 느낍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자존심이 앞설수록, 우리는 뻔히 보이는 빈틈을 가리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도구 뒤로 숨거나 남 탓을 하느라 정작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내가 놓쳤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기 객관화(Self-awareness)가 없다면, 그 어떤 애자일 프로세스나 고도화된 도구를 들여와도 팀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피드백은 통제가 아닌 성장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플레처 교수는 “잘했어(Good job)라는 말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며 연주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뼈를 깎아내리는 일방적인 폭언과 비난은 ‘투셰’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극도로 위축시켜 실수를 감추게 만들고, 결국에는 소통의 문을 닫아걸게 만듭니다.
진짜 건강한 피드백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서로가 자신의 빈틈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돕는 안전한 거울이어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을 때, 비로소 동료 간의 따뜻한 “수고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잘 풀어냈습니다”라는 인정 한마디가 안주가 아닌 더 큰 도약을 위한 단단한 디딤돌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한 걸음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거창한 장편의 환상을 내려놓고 18분짜리 단편을 먼저 찍었던 것처럼, 그리고 펜싱 선수가 칼끝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담담하게 ‘투셰’를 외치는 것처럼.
복잡한 현실 속에서 팀과 리더가 지녀야 할 태도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질 때까지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오늘 당장 검증할 수 있는 작은 한 조각을 세상에 내놓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빈틈을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주하며 동료들과 함께 고쳐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확실한 프로젝트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 붙잡아야 할 가장 진솔한 실행이자 배움의 태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팀은 거대한 계획 뒤에 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작지만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